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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이름을 바꾸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답니다. 이런 이름입니다. 김솔로 신난다 임신중 판대기 조용희 백수지 선택중 강간범 안달남 주사위 마노라 한남자 안돼요 계소리 임금님이라는 이름입니다.

항상 부인의 사진을 지갑에 넣고 다니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런 남편이 너무 고마워 아내는 남편에게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부인 : 당신은 왜 항상 내 사진을 지갑 속에 넣고 다녀요?
남편 : 아무리 골치 아픈 것이 있어도 당신 사진을 보면 정신이 번쩍 들거든.....

이번에 한국에 잘 다녀 왔습니다. 기도하여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거리를 가다가 어느 여인이 남편을 찾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여보, 어디 계세요? 내가 당신이 좋아서 찾는 것이 아니라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찾는 것이에요.” 첫 말은 좋았지만 뒷말이 씁쓸했습니다.

다같이 “ 나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나에게는 하나님의 큰 뜻이 있습니다.”

인생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목마르다. 허무하다.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런 중에서도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에 대한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도 나는 괜찮은 편이다. 나는 별 볼일 없다. 사랑과 존경을 받을 만하다

오늘 성경에는 이름도 신분도 나타나지 않는 험한 인생을 살아온 한 여인이 나옵니다. 이름하여 우물가의 여인입니다. 이 여인의 환경은 좋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환영해 주지 않는 목마르고 허무하고 고통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유대인들에게 천대받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종교적으로도 피해자였습니다. 종교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었습니다.  신앙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떳떳하게 내 놓을 수 없는 어두운 생활을 하는 여인이었습니다.  사람을 피해 다니는 사람으로 한 낮에 우물에 물을 길러 왔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자신의 과거에는 아픔이 있고, 현재에는 어둠이 있는 이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에게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고 싶다”는 선물을 안고 찾아가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분이십니다.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힘이 없고, 인생에서 도망가고 싶은 사람에게 선물을 들고 직접 찾아가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예수님을 만나는 축복이 있으시길 축원합니다.

예수님과 아픔 밖에 없는 여인의 만남을 통해 발견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무도 이 여인을 인간으로 상대해 주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만나주셨고, 섬겨주셨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9장 10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잃어버린 자는 잊혀진 자입니다. 인생이 파산된 사람입니다. 어느 누구도 기억해 주지 않는 사람입니다. 내일이 없고 희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자의 영혼을 찾아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한 영혼, 자신의 삶에서 도망치고 싶은 한 여인을 만나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수가 마을 여인의 만남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요? 요한복음 4장 1절에서 9절에 있는 그 만남의 배경에서 예수님의 특별한 두 가지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1절에서 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라)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던 중에 사마리아라고 하는 지역을 통과하십니다. 그 과정에서 작은 마을 수가 성에 들러 야곱의 옛 우물이라는 곳에서 쉬시다가 한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두 가지 질문을 갖게 됩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 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수군대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주는 것이 세례 요한보다 더 많다고 하는
질투와 경쟁의 소리를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준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소문은 예수님과 세례 요한을 경쟁하게 합니다. 이런 문제를 만든 사람은 바리새인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를 듣고 유대를 떠나신 겁니다.

인간의 시기와 질투와 경쟁을 피하신 것입니다.
대부분 우리는 시기와 질투와 경쟁심이 있습니다. 아니라고 하겠지만 가만히 보면 강한 질투, 시기심, 경쟁심에 불타고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일로 마음 상하고 상처받은 후 또 다른 상처를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는 피하셨습니다. 시기와 질투와 경쟁심으로 일하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덕을 만들지 못합니다. 일은 해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조용히 피하시는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이동하십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성숙한 인격자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선이나 정의라는 이름으로 쉽게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인생이 피어나지 못하게 기를 꺾어버립니다. 예수님은 상처 주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약자에게도 사랑으로 만나시고 소중한 존재로 여겨주십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왜 사마리아로 가셨을까요? 사마리아는 모든 사람들이 꺼리는 땅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지역 감정 때문입니다.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은 서로 만날 수 없는 관계입니다. 같은 민족의 피를 나누었지만 서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수가 성에 사는 이름 없는 이 여인은 누구든지 만나기 싫어하는 신분을 가졌습니다. 이 여인을 만나면 자기 신분에 손해를 보게 되고 자존심이 상하는 그런 부류의 삶을 사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만나 공주처럼 대해주십니다. 4절에서 6절까지 말씀을 보겠습니다.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의지적인 결단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불편하면 피해갑니다. 아예 관계를 맺지 않으려 합니다.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는데 사마리아로 통과하는 것은 지름길입니다.

그러나 싫으면 멀어도 돌아가는 게 인간입니다. 예수님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의도적으로 그 사마리아 땅으로 갔습니다. 선교란 무엇입니까? 가기 싫은 땅에 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싫어하는 것을 하는 게 선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루는 길입니다.

6절에 예수님께서 피곤하셔서 야곱의 우물 곁에 앉으셨습니다. 험한 곳에서 예수님께서 지쳤습니다. 그리고 우물가에 털썩 주저앉으신 겁니다. 때가 제 육시라고 했습니다. 우리 시각으로 낮 12시입니다. 예수님이 힘들고 지친 상황 속에서 한 여인이 물동이를 들고 나타납니다. 중동에서 낮 12시의 태양을 아십니까? 이때는 너무 더워 다니는 사람이 없습니다. 물을 길러 우물에 가는 것도 선선한 아침이나 저녁 때를 이용합니다. 그런데 한 여인이 우물에 왔습니다.

외로운 여인, 아무도 만나주지 않는 여인을 만나시고, 이해하시고, 사랑하시고, 격려하시고, 축복하시고, 꿈을 주시고, 메시아를 보여주시고, 삶의 희망을 주십니다.

7절에서 9절까지 말씀입니다.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버림받은 여자, 인생이 목마른 여자, 삶의 의미와 희망을 잃은 여자, 사람과 부딪힐까 봐 아무도 다니지 않는 정오에 물을 길러 온 여자를 대하는 예수님의 태도는 정중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화법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비열하지 않고 억누르지 않으며 따뜻하게 접근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자에 대해 이미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에 대해서도 다 알고 계십니다. 이
미 다 아시고 만나주십니다. 다른 사람은 속을지라도 예수님께서는 속지 않으십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을 모릅니다. 다만 유대인 남자가 멸시 당하는 사마리아 여자인 자신에게 말을 걸어줘 충격을 받았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물 한 그릇을 줄 수 있겠느냐고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지식이 있거나 탁월성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찾아가서 구원을 요청할 만큼 종교적, 도덕적으로 성숙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상대할 만큼 높은 신분도 아니지만, 예수님은 인생에서 도망가고 싶은 이 여인을 만나주십니다.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지금 예수께서 우리에게 물 한 그릇을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물 한 그릇을 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누구도 이 여인에게 도움을 구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예수님은 그 여인을 인격적으로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여러분 교만한 마음을 꺾으십시오. 오만한 마음을 접으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요청을 받아들여 마음의 문을 여십시오. ‘내가 네 마음의 문을 두드린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너에게 들어가 함께 하리라.’ 오늘 그런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여인은 유대인 남자가 자신에게 물을 달라고 말을 건네는 것 자체가 이상했습니다.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이게 여인의 첫 번째 반응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요, 인류의 구세주요, 메시아인 예수님께서 천한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 것은 역설입니다. 우리는 이 여인의 반응에서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유대인에 대한 해묵은 편견입니다. 오랫동안 무시당한 사마리아인으로서 가질 수 있는 상처입니다. 우리도 그런 본능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특별히 잘못한 것도 아닌데,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킵니다.

다른 하나는 여인에게 남자에 대한 편견과 상처가 있었을 겁니다. 여인은 ‘남자는 다 도둑
들이다’라는 마음 깊은 배신감과 불신으로 비뚤어진 남성관을 형성했을 겁니다. 여인이 가진 두 가지 편견은 예수님에게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런 반응을 보였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여인을 꿰뚫어 보고 계십니다. 이 여인은 자신을 몰랐습니다. 우리도 자신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십니다.

1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
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예수님의 정중한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천한 여자라고 함부로 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과 애정으로 정중하고 겸손하게 만나주십니다. 또 예수님은 여인에게 충고하거나 설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사람을 만나면 자신이 생각한 대로 설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 예수님은 여인의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만날 때 자신의 수준에 맞추라고 요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람의 수준으로 낮추 십니다. 이 여인은 지적, 종교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아니며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따뜻한 마음으로 대낮에 물 길러 온 여인을 대해주고 있습니다.

10절 말씀에서 예수님은 여인에게 알아듣기 쉽게 구원을 설명하십니다. 이 여인에게 ‘거듭남’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쉽게 말합니다. ‘여자여, 당신이 만약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면’이라며 시작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구원, 예정, 섭리라는 말은 어느 정도 배운 사람은 알아듣지만, 이 여인에게는 '하나님의 선물이 있다는 것을 알았더면'이라고 접근하고 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해 알아듣기 쉽게 접근하십니다.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이라고 설명합니다. 자신이 메시아나 구원자라고 강조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여인의 마음을 배려하고 사랑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구원의 방법도 친절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만일 물 좀 달라 하는 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구하였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구원의 비밀은 구하는 데 있습니다. ‘구하다’는 말은 ‘찾다’, ‘두드리다’, ‘바라보다’, ‘소망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예수님에 대해 눈을 떠 구하고, 찾고, 두드리고, 바라보고, 소망한다면 그것은 구원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10절 말씀에서 마지막으로 발견하는 것은 ‘약속’입니다. “네가 그에게 구했다면, 영원히 목 마르지 않는 생수를 너에게 주었을 것이다.” ‘생수’는 우물물과 다릅니다. 이 여인이 생각한 것은 ‘물’이고, 예수님이 생각하신 것은 ‘생수’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네게 줄 수 있다.” 이 말을 듣고 여인은 즉시 반응합니다. 어느새 예수님에 대해 갖고 있던 편견과 상처를 잊어버리고 ‘생수’라는 말에 빨려 들어갑니다

1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여인은 생수에 대해 관심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관심이 있습니다. 구원에 관심이 있습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가 있다면 정말 마시고 싶어합니다. 천국이 있다면 가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원할 뿐이지 막상 거절하고 맙니다. 왜냐면 마음의 상처와 편견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여인은 정말 그런 게 있냐고 묻습니다. 생수 란 개울물도, 고인물도 아닙니다. 시냇물, 호숫물, 바닷물은 더욱 아닙니다.

우리는 늘 가짜 진리와 모조품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진짜를 만나본 경험이 없습니다. 사람
도 진짜 사람을 만나면 충격을 받습니다. 소설에 나오는 사랑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소설을 통해 만나면 그 이야기에 빠지고 맙니다. 그만큼 우리는 사랑
과 진리에 목말라 있습니다.

이 여인은 생수에 대해 듣고 순간적으로 기뻤지만, 세상에 그런 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야기가 12절 말씀입니다.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여인은 물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물이 소중하다는 것을 압니다. 이
물은 자신뿐 아니라 조상이 마셨던 물이요, 그 후손과 짐승들이 마시고 살아왔다는 것을 너
무도 잘 압니다.

13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아브라함의 우물, 이삭의 우물, 야곱의 우물물은 마셔도 다시 목마른 것이 공통점입니다. 우
물 없이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조상들이 팠던 우물의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세상의 종교는 다시 목마른 종교라고 합니다. 종교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목이 마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 성경의 말씀을 다 지켰다고 할 만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종교의 행위로 순간을 넘길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영혼은 목마르다는 것입니다.  조상들이 주었던 우물은 순간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지만, 다시 목마를 것이라고 합니다.

14절을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알아듣기 쉬운 말로 메시지를 전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물, 구원자가 주는  물은 조상들이 마신 물과 다르고, 한 번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알면 인생이 목마르지 않습니다.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으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구원이 그렇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설교를 들으면 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잘 모릅니다. 이런 걸 ‘타고르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인도의 타고르는 하나님과 가깝게 이야기한 것 같지만 그에게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하나님의 실체가 잡힙니다. 2천년 전에 죽은 예수를 어찌 만날 수 있습니까. 성령을 받으면 됩니다.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에 이 여자가 빠져듭니다. 예수님께
서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람은 빵을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육신을
위한 빵이 있지만 영혼을 위한 빵도 있습니다. 육신을 위해 마시는 물이 있지만 영혼을 위
해 마시는 물도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생수에 대한 아주 중요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생수란 구원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존경할 만한 위대한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의 삶과 교훈이 훌륭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전능하지 않습니다. 영원하지 않습니다. 우물은 우물일 뿐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만이 이루실 수 있습니다. 완전하시고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단(heresy)들이 있습니다. 질문하십시오. 당신의 교주는 완전합니까? 전능합니까? 영원합니까?

생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야곱의 우물은 가서 퍼오면 됩니다. 그 물을 마시면 다시 목마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원한 물,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물입니다.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요 7:37,38)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마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떡을 주시면서 먹으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먹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와서 피와 살이 되어 자신과 함께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믿음이란 명상이 아니라 경험입니다.

사마리아 수가 성의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에 점점 빨려 들어갔습니다.
여인은 예수님께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하고 물었습니다. 당신이 그 어떤 사람 보다 크신 분입니까? 라고 묻는 것입니다.

15절에서 이 여인은 굴복합니다. 어떤 굴복인지 말씀을 보겠습니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이 여인이 좀 발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 거부하다가 호기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한 발을 내딛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청천벽력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16절입니다.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다음 단계로 끌고 가십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이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허를 찌르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이 여자를 묶고 있는 과거가 올무로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과거가 정리되지 않은 미래는 없습니다. 여인은 병의 근원을 숨기고 외과적 현상만을 말했습니다.

사람에게는  듣고 싶은 말이 있고 숨기고 싶은 과거가 있습니다. 그 말만은 하지 말라.  정리 되어야 할 과거가 정리되지 않고서는 미래를 향한 새 출발을 할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과거가 있습니다. 상처를 치유하고 살기 보다는 묻어두고 삽니다. 상처를 묻어두고 앞으로가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과거가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그 현상의 근본을 고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과거를 치유하기 원하셨습니다. 남편을 데려오라는 말씀에 여인은 화들짝 놀랍니다. 그래서 17절에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오늘 우물가의 여인은 과거를 숨기려하지 않고, 솔직히 털어 놓습니다.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  남자는 있지만 남편은 없습니다. 여자는 있지만 아내는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른 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말이 옳도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과거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문제를 다 알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과 우물가의 여인은 처음 만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인의 과거를 다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네 남자를 데려오라”고 하지 않으셨고 “네 남편을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이 당황한 것입니다. 남자를 데려오라고 하면 아무나 가능하지만 남편을 데려오라고 하니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에 대해 들은 얘기도 없지만 과거를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의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우리의 과거는 물론, 미래까지 다 아시는 분입니다. 만나서 얘기 듣고 아시는 게 아니라 만나지 않고 얘기 듣지 않아도 다 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고백하지 않아도 이미 우리를 알고 계십니다.

누군가 나의 과거와 마음속 생각까지도 다 아신다면 어떻게 반응할까요? 자신의 전부를 알고 있다는 데 부끄럽고 겁이 날 겁니다. 한편 정반대로 반응할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안심과 위로가 올 겁니다. 이미 알고 있으니 숨길 게 없어 편합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겁니다. 모르는 사람에게 감추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는 사람에게 감춘다는 것은 속 보이는 일입니다. 하지만 나를 모르고 사랑하는 게 아니라 다 아시고 사랑하신다면 감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다 아시고 만나주시고 친절히 대해주시면 충격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다 아시고 만나주십니다. 그래서 굉장히 충격을 받습니다. 19절
말씀을 보십시오.

신앙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당신의 과거를 청산하고 회개가 일어나야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남편을 데려오라고 했다면 여인은 도망갔을 겁니다. 그러나 이제 도망 갈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 붙잡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에게서 도망가지 마십시오. 그분에게 치료되지 않는 종교적인 상처, 인간적인 상처, 과거의 아픔을 털어 놓으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의 과거를 치료하십니다. 그리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 구원을 주십니다. 이 축복을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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